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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아버님과 위스키, Father and Whisky

by 파스텔블링크 (PastelBlink) 2021.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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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초부터 생활기록부에 적게되는 장래희망란에는 학생마다 다양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대통령이요"  권력의 맛을 갖고 싶은 아이지만 그 뒷감당이 얼마나 머리 아픈 일인지 모르고 적습니다.  "선생님이요"  눈앞의 선생님이 하시는 가르침이 너무 멋있어서 자신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의사요"  아픈 사람들을 고쳐준다는 순수함도 있고, 의사 아빠나 엄마를 둔 반 친구가 옷 잘입고 또래 아이들들도 갖기 힘든 브랜드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게 부러운 학생일 수 있습니다.  "컴퓨터과학자요" ㅎㅎ 공상과학영화를 많이 봐서 그 모습을 현실로 바꾸고 싶습니다. 좀 일찍 머리가 깨어 있는 아이라면 집에서 오빠나 누나가 요즈음 직장 구하기가 그나마 나은 학과라는 얘기를 들었거나, 코딩실력으로 창업해서 큰 돈을 번 사람들의 얘기를 귀기울여 들은 학생일 수 있습니다.  "아이돌이요" 이 친구와 같은 소망은 K-팝이 대박을 터트려서 BTS, 블랙핑크가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걸 보고 꿈을 갖게 된 친구들입니다. 

 

"배우가 될거야" 이 친구들도 한국 배우들이 아시아권 국가에서 유명세를 탄 배우들이 등장하면서 아시아권에서 유명한 배우가 되는 것으로 꿈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카데미상을 윤여정 배우님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아, 우리도 이게 가능할 수 있는 일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장래희망란에 "세계적인 배우" 라고 적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윤여정 배우님의 초등학교 꿈이 세계적인 배우가 아니었다는 걸, 그리고 "(윤여정 배우님의) 두 아이 키우고 먹고 살기 위해서" 해 오신 생계형 배우였다는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인이 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초딩 1학년 장래희망란에 적었던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장래희망대로 살고 있는 소수의 성인들도 녹녹치 않은 현실을 버텨내며 힘겹게 희망을 지켜가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초딩1학년 장래희망이 "대통령" 이었던 한 아이가 있습니다.  초딩 2학년, 3학년, ...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이 아이의 장래희망은 "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시골에서 상경해서 자수성가하신 아버님.  어릴 적 살던 집은 서울 어느 변두리 초라한 방 두칸짜리 집이었습니다.  두 칸이래 봐야 두번째 방은 성인 2명 정도 누우면 꽉찰 공간 정도였고, 그 곳엔 아버님 형제분들이 서울로 유학오실 때마다 지내신 공간이라, 삼촌을 제외한 가족은 나머지 방한칸에서 지냈습니다.  대문옆 담벼락에는 대충 만들어 놓은 시멘트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과 연결된 아담한 옥상위에 마련된 장독대에서 천하?를 내려다 보며 호연지기의 꿈을 키웁니다.  그 아이는 옥상 위에서 징기스칸이 꿈꾸던 만주벌판을 상상합니다. 아궁이가 오래되서 어머니는 잠결에 연탄가스를 마시고 실신해서 큰 일날 뻔한 날도 겪습니다. 아이 집에는 TV가 없어서 저녁을 후딱 먹고 TV가 있는 옆집 친구집에 매일 놀러가서 대청마루에 함께 TV를 보기도 했습니다. 한 여름이면 홍수로 집안에는 흙탕물 범벅이 되었고, 월차를 내신 아버님은 힙겹게 땀을 뻘뻘 흘리며 물을 퍼냅니다.  아무 생각없는 아이는 김장할 때 쓰는 큰 플라스틱 양동이를 타고 물놀이 할 생각만 하다가 연신 물 속에 자빠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어머니가 사 주신 멋진 양복에 나비넥타이까지 하고 아버님 손을 잡고 고속버스를 탄 아이는 할어버지가 하시는 가게의 번호뽑기 경품추첨 상품을 뜯어 볼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납니다.  그리고 저녁 늦게 할어버님 댁에 도착해서 피곤함에 아버지 무릎을 베개 삼아 잠에 곯아 떨어집니다.  개가 짖는 소리에 아침을 맞은 아이가 눈을 뜬 아이는 아버지가 안보여 순간 멍해집니다.  아버지는 급한 볼일이 있어서 먼저 서울가셨고, 곧 올테니 할아버지랑 살자는 사탕발림에 할아버지 방 한켠에 만들어진 작은 가게의 풍선선물 뽑기에 신이 나서 그런 줄 알고 지냅니다.  그리고, 수 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가게의 경품추첨 상품도 다 뽑아서 재미가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같은 동네에 사는 또래의 사촌들과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고, 원치 않게 배운 지방 사투리는 그 아이가 서울의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고향분들과 전화 통화할 때마다 불쑥불쑥 터져 나오게 된 원인이 됩니다. 어릴 때 익힌 어학교육은 그래서 무서운가 봅니다. 한 여름이 다가 왔고, 아이는 어느덧 육 개월의 시간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보낸 지 육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어느 날, 아버지가 오셔서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갑니다.  후일 이 아이는 그 일이 가난으로 인해 자식을 건사하기 힘들어진 어머니와 아버지가 눈물을 머금고 아이를 할아버지 집에 맡겼다는 걸 이해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30대에 회사를 창업하고 해외무역 "오퍼상"을 시작합니다.  좋은 사업수완과 끝없는 노력, 뛰어난 암기력으로 외국어를 독학으로 익힌 훌륭한 영어 일어 아랍어 회화 실력을 밑천삼아 사업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를 고향 집에서 다시 데려 올 때 정말 아내와 아이들에게 더 이상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는 다짐이 아버지의 초능력을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작지만 꼬박꼬박 들어 오던 월급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몇 개월동안 한푼도 들어오지 않는 힘든 상황을 내색하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강인함과 인내가 아버지를 쓰러지지 않게 하십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아이의 눈에는 아버지가 늘 승승장구하시는 모습으로만 비춰집니다.  사업은 커져서 공장과 건물이 생깁니다.  돈만 많이 버는 아버지가 아니라, 돈도 없고 빽도 없어도, 아내와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면 너도 할 수 있어" 라는 걸 실제로 보여 준 그런 아버지를 닮고 싶었습니다. 

 

사업은 오래 전에 정리하셨고, 자식은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정말 멋진 삶을 살아오신 아버님이 어느날 너무 다른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크게 두 세번 말해야 알아 들으실 때가 많고, 가끔 뜬금없는 얘기를 혼자 말씀하시다가 어머니를 놀라게 하시기도 합니다.  마음속의 어느 위인보다 훌륭한 그 분을 갑자기 떠올리는 날이면 세월의 덧없슴에 울컥해 집니다.  술이 고픈 저녁입니다.  오늘은 소주보다는 해외사업으로 날리시던 아버님이 가끔 나눠 주시던 위스키 언더락으로 마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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